이목 (조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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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목은 전국 시대 조나라의 장군으로, 흉노 방어와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북방 국경 수비를 담당하며 흉노를 상대로 수비 위주의 전략을 펼쳐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이후 흉노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10년 이상 조나라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는 연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무안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이간질로 인해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 이후 조나라는 멸망했다. 사마천은 이목을 뛰어난 장수로 평가했으며, 그는 킹덤과 같은 대중 매체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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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 (조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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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 | |
이름 | 이목 (李牧) |
사망일 | 기원전 229년 |
사망 장소 | 한단, 조나라 (현재의 허베이성) |
직업 | 군사 장군 |
중국어 표기 | |
간체자 | 李牧 |
병음 | Lǐ Mù |
웨이드-자일스 | Li Mu |
일본어 표기 | |
이름 | 이목 (李牧) |
시대 | 조나라 |
칭호 | 무안군, 대장군 |
사망년도 | 기원전 229년 |
사망 장소 | 한단 |
병음 | Lǐ Mù |
자 | 목 |
아버지 | 이기 |
자녀 | 이믹, 이홍, 이선 |
참고 문헌 |
2. 생애
이목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의 뛰어난 장군이다. 그는 북쪽 국경에서 흉노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남쪽에서는 강대국 진나라의 거센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하여 조나라를 지탱한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장평 전투 이후 약화된 조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며 어려운 시기에 활약했다. 그의 구체적인 활동은 북방에서의 흉노 방어, 조나라 재상으로서의 활동, 진나라와의 전쟁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 1. 북방 수비와 흉노와의 전쟁
이목은 본래 조나라 북쪽 국경인 대와 안문군 사이에 주둔하며 흉노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맡은 장군이었다.[6] 그는 국경 방위를 위해 독자적인 군사 운영 권한을 부여받아, 관리를 적절히 배치하고 세금을 걷어 군비를 충당했으며,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는 등 후생에 힘쓰고 활쏘기와 말타기 훈련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또한 봉화를 많이 설치하고 첩자를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병사들을 후하게 대우했다.[16][6]초기에 이목은 흉노가 침입할 때마다 병사들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성 안으로 들어가 수비에만 집중하도록 명령했다. "흉노가 약탈하러 들어오면 즉시 성으로 들어가 안전을 확보하고, 굳이 나가 싸우려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6] 조나라 군대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전략 때문에 흉노뿐만 아니라 조나라 병사들 사이에서도 이목을 겁쟁이라고 여기는 평가가 나왔다.[16][6] 조나라 왕이 이목의 방식을 문제 삼아 꾸짖었으나 이목은 이를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은 화를 내며 이목을 해임하고 다른 장수를 임명했다.[16][6]
이목의 후임 장수는 흉노가 쳐들어올 때마다 군대를 내보내 싸웠지만, 매번 불리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국경 지역의 백성들은 농사와 목축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16][6] 이에 조나라 왕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이목을 불렀으나, 이목은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사양했다.[16][6] 조나라 왕이 강제로 군사를 이끌게 하자, 이목은 "왕께서 부득이 저를 쓰시려거든, 예전에 제가 했던 방식 그대로 하게 해주신다면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내걸었고, 왕은 이를 허락했다.[16][6]
다시 국경으로 돌아온 이목은 이전처럼 수비 위주의 전략을 유지하며 군대를 양성했다. 후한 대우를 받은 병사들이 싸우기를 원하자, 이목은 마침내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그는 튼튼한 수레 1,300대, 좋은 말 13,000마리, 전공을 세워 상을 받은 용사 5만 명, 활을 잘 쏘는 병사 10만 명을 선발하여 부대를 조직하고 훈련시켰다.[16] 또한, 흉노를 유인하기 위해 들판에 가축과 백성들을 일부러 풀어놓았다.[16]
흉노의 선우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침입하자 이목은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수천 명의 병력을 버려두고 후퇴했다.[6] 이에 속은 선우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오자, 이목은 미리 배치해 둔 복병과 좌우 양익의 기동 부대를 이용하여 흉노군을 기습하고 포위 공격했다.[16][6] 이 전투에서 이목은 흉노 기병 10만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으며[16][6], 나아가 담람(襜襤)을 멸망시키고 동호를 격파했으며 임호를 항복시켰다.[16][6] 흉노의 선우는 멀리 달아났고, 이후 10년 이상 흉노는 조나라 국경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16][6]
2. 2. 조나라 재상 (상국)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목은 공적으로 인해 조나라의 재상직인 상국(相國)에 임명된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진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후, 자신의 상국과 어사(御史)들에게 "조나라 왕이 그 상국 이목(李牧)을 보내 맹서를 약속하기에 그 인질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 맹서를 어기고 우리 땅 태원에서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잡았다."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17] 이목이 조나라 상국으로서 진나라에 파견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연표에 따르면 기원전 243년(도양왕 2)에 진나라에 인질로 갔던 조나라 태자가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18] 진 시황제의 발언을 고려하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목이 상국으로서 진나라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이목은 조 도양왕이 창후(倡后)와 혼인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였다. 창후는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과부였기에, 이목은 "여인이 정숙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불안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한 집안을 망하게 하였는데, 대왕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조 도양왕은 "나라가 어지럽고 어지럽지 않고는 과인이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라고 답하며 이목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결국 도양왕은 창후와 혼인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조왕 천을 후계자로 삼았다.[19]
2. 3. 진나라와의 전쟁
아여 전투에서 진나라를 격파했던 명장 조사가 죽고, 외교적으로 진나라에 맞설 수 있었던 인상여마저 병으로 쓰러진 조나라는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에게 참패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이후 기원전 245년에는 명장 염파마저 악승과의 불화로 조나라를 떠나면서 진나라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기원전 236년에는 업이 진나라에게 함락되었고,[7] 기원전 234년에는 호철이 지휘하던 조나라 군대가 평양(平陽)에서 진나라에게 패배하여 10만 명의 병사를 잃는 참패를 당했다(평양 전투).[[6]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유무왕은 북쪽 변경에서 흉노를 막아내며 능력을 인정받은 이목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대장군으로 삼고 진나라에 대한 반격을 맡겼다.[6][8]기원전 233년, 대장군에 임명된 이목은 곧바로 진나라의 공세에 맞서야 했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적려(赤麗)와 의안(宜安)을 공격해오자,[21] 이목은 군대를 이끌고 비(肥) 땅[23] 또는 의안[6]에서 진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다.[22] 이 전투(비하 전투)에서 이목은 진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진나라 장수 환의(桓齮)는 패하여 달아났다.[24][6][9] 이 큰 공으로 이목은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25][8]
기원전 232년, 진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의 번오(番吾)를 공격했지만, 이목은 이 공격 역시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진나라 군대를 다시 한번 격파했다(번오 전투).[[26][8][2] 나아가 이목은 남쪽으로 한나라와 위나라의 국경 지대까지 진출하여 진나라에 빼앗겼던 영토 일부를 되찾기도 했다.[27][6] 당시 전국시대 말기, 강력한 진나라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낼 수 있었던 장수는 조나라의 이목과 초나라의 항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목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조나라는 장평 전투의 후유증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현저히 약화된 상태였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다. 위나라, 연나라, 한나라는 이미 쇠약하여 조나라를 도울 여력이 없었고, 제나라와 초나라는 강대국 진나라와 맞서기보다는 조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기원전 229년, 진왕 정은 왕전에게 대군을 주어 조나라를 다시 침공하게 했다. 왕전은 양단화(楊端和), 강외(羌瘣), 이신(李信) 등 다른 장수들과 함께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이목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진나라 수뇌부는 조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목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진나라는 조나라 조정에 간첩을 보내 조왕의 총애를 받던 간신 곽개(郭開)와 한창(韓倉) 등에게 뇌물을 주어 이목을 모함하도록 사주했다. 곽개 등은 조왕에게 이목과 사마상(司馬尚)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다. 조왕은 이 모함을 믿고 이목과 사마상을 해임한 뒤, 조총(趙蔥)과 안거(顏聚)를 새로운 장수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목은 왕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3]
이목이 제거되자 조나라의 방어선은 급격히 무너졌고, 결국 진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대나라에 남아 있던 조나라의 마지막 잔존 세력마저 진나라에 의해 정복되면서 조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2. 4. 이목의 죽음
기원전 229년, 진나라는 장군 왕전(王翦)과 강외, 양단화 등을 보내 대군으로 조나라를 다시 침공했다.[28][10] 조나라에서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에게 군대를 이끌고 이를 막도록 하였다.[29] 이전 전투들에서 이목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던 진나라는 이번에도 이목의 수비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30]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진나라는 이목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조왕 천이 총애하던 간신 곽개(郭開)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 이목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게 했다.[6] 또한, 왕의 어머니인 도창후 역시 진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조왕에게 이목을 참소했다는 기록도 있다.[11] 평소 이목의 높은 명성과 군 장악력을 경계하던 조왕 천은 이들의 참언을 믿고 의심하기 시작했다.[9]
결국 조왕 천은 조총(趙蔥)과 제나라 출신 장수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을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목은 전선의 장수로서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조왕은 사람을 보내 이목을 몰래 체포하여 처형하고, 사마상도 해임시켰다.[31][6][8][9] 이목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에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으나, 《사기》 권43 조세가에는 자세한 정황 없이 단순히 이목이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이 파면되었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한편, 《전국책》의 사공마 관련 기록에는 간신 한창(韓倉)의 참언으로 해임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12]
이목이 죽은 지 불과 3개월(혹은 5개월[12]) 만에, 조총과 안취가 이끌던 조나라 군대는 왕전에게 크게 격파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8][9] 이듬해인 기원전 228년 10월, 진나라 군대는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함락시켰고, 조왕 천마저 사로잡히면서 조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32][13] 이목의 제거는 조나라 멸망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 셈이다.
3. 가계
이목의 가계(家係)는 당대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후대의 기록인 《신당서》에 전해진다.
《신당서》에 따르면, 조군 이씨(趙郡李氏)는 진나라에서 사도를 지낸 이담(李曇)과 그의 둘째 아들이자 진나라 태부를 지낸 이기(李璣)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기에게는 이운(李雲), 이목(李牧), 이제(李齊)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목이 조나라의 재상이 되어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이 조군(趙郡)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35]
이목의 직계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이담(李曇) | 진나라 사도[14] |
아버지 | 이기(李璣) | 진나라 태부[14] |
형 | 이운(李雲) | [14] |
본인 | 이목(李牧) | 조나라 재상, 무안군 |
동생 | 이제(李齊) | [14] |
아들 | 이골(李汨) | [36][15] |
아들 | 이홍(李弘) | [36][15] |
아들 | 이선(李鮮) | [36][15] |
손자 (이골의 아들) | 이량(李諒) | [36][15] |
손자 (이골의 아들) | 이좌거(李左車) | 광무군(廣武君), 초한전쟁 시 한신의 참모[36][37][15] |
손자 (이골의 아들) | 이중거(李仲車) | [36][15] |
이목의 손자 중 한 명인 이좌거(李左車)는 광무군(廣武君)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훗날 초한전쟁 시기 명장 한신(韓信)의 참모로 활동하였다.[37]
4. 평가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조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명장들인 염파, 인상여, 조사, 이목 등의 열전을 함께 묶어 구성하였다. 이들의 열전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에 수록되었으며, 여기서 이목은 "양장(良將)", 즉 "뛰어난 장수"라고 평가받았다.
남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는 《천자문》에서 "기전파목(起翦頗牧) 용군최정(用軍最精)"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백기, 왕전, 염파, 이목 등이 군사를 가장 잘 부렸다는 의미이다.
이목은 때때로 중국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모셔지며, 일반적으로 백기와 함께 묘사된다. 또한 산시성 옌먼관의 톈셴문 옆에 있는 사원인 진변당에서도 기려지고 있다. 그는 현대의 만화 《킹덤》과 그 애니메이션 각색에서도 중심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Li Mu 李牧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2]
웹사이트
Li Mu 李牧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3]
웹사이트
Li Mu 李牧 (www.chinaknowledg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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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策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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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歴史産生影響的帝王伝 秦始皇伝
中国国際広播音像出版社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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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頗藺相如列伝第二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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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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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世家第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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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国策 巻二十一 趙策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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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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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始皇本紀第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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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趙悼倡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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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source
戰國策黃丕烈札記/秦/五#文信侯出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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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国年表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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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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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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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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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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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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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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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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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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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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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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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가, 염파인상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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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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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도양창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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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재상세계표 1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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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신당서》 권72 上 재상세계표 1 上
[37]
서적
《사기》 권92 회음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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